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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아리랑

정선아리랑 유래

by 정선아리랑 모임 2024. 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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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旌善) 아리랑은 "아라리"라는 이름으로 정선을 중심으로 강원도와 경북 북부지역, 충북지역, 경기도 동부지역에서 오래전부터 구비전승 되어온 민요다.

정선아리랑이 이 고장에 널리 불리어지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600여 년 전인 조선조 초기(朝鮮 初期)라 전한다. 당시 고려 왕조를 섬기던 선비들 가운데 불사이군 (不事二君)으로 충성을 다짐하며 송도(松都)에서 은신하다가 정선(지금의 남면 거칠현동 居七賢洞)으로 은거지를 옮겼다. 평생 산나물을 뜯어먹고 생활하면서 지난날에 모시던 임금을 사모하고 충절(忠節)을 맹세하며 입지 시절의 회상과 가족,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곁들여 고난을 겪어야 하는 심정(心情)을 한시(漢詩)로 읊은 것이 지금에 정선아리랑 가사로 인용된 것이 많다.

그때의 선비들은 이러한 비통(悲痛)한 심정을 한시(漢詩)로 지어 율창(律唱)으로 부르던 것을 지방의 선비들이 듣고 한시를 이해 못하는 사람들에게 풀이하여 알려 주었다. 지방에 구전되던 토착요에 감정을 살려 부른 것이 오늘에 전하여지고 있는 아리랑 가락이다. 그 후 사화(士禍)로 낙향한 선비들과 불우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애창하였고 전란과 폭정시(暴政時)에 고달픈 민성(民聲)을 푸념하며 내려오다가『아리랑. 아리랑』하는 음률(후렴구)을 붙여 부르게 된 것은 조선조 후기(또는 경복궁 중수 시)라고 한다.

한국강제병합조약(한일 합방) 후부터 일제강점기 말엽까지에는 나라 없는 민족(民族)의 서러움과 울분을 애절한 가락에 실어 스스로를 달래 왔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사상(思想)이 담긴 노래는 탄압(彈壓)됨에 따라 애정과 남·여 관계의 정한(情恨)을 소재로 한 새로운 노래가 많이 불리어 졌다.

해방 이후 남북이 분단되고 한국전쟁을 거치며 반공(反共)의 분위기를 드러내기도 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한민족 통일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담아 부르기도 했다.

정선아리랑에는 시대정신이 그대로 배어있다. 그러면서 남녀 간의 사랑과 그리움, 남편에 대한 원망, 시집살이의 서러움, 고부간의 갈등, 산골마을의 지난한 삶과 일의 고단함 그리고 유희 등 삶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렇게 구전되어 온 정선아리랑은 1971년 12월 16일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강원도의 대표적인 무형문화유산이 되었고, 체계적인 연구와 전수는 물론 다양한 활동으로 오늘날 우리나라의 수많은 아리랑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아리랑으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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